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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2) 겨울 무밭에서
[문상금의 시방목지](2) 겨울 무밭에서
  • 문상금
  • 승인 2021.01.13 09:3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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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무채색이다. 춥고 흰 뼈마디 아픈 그리고 그리움이 많은, 재탄생을 향한 인고(忍苦)의 시간들이다. 눈은 발자국이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를 따라 걸어가 보니, 원(元) 그리움이 있다. 꼭꼭 숨겨둔 사람과 시(詩)가 있다. 무는 꿈이다. 달 항아리다. 쑥쑥 자란다. 시원한 물이 많고 달다. 무밭은 꿈들이 자라는 꿈의 밭이다. 잠이 없는 시인은 늘 꿈속에서나 꿈밖에서나 시(詩)를 쓴다.”

겨울 무밭에서

-문 상 금

무들도
꿈을 꾸나 보다

겨울 하논
희끗희끗한 눈발
흩날리는 무밭에

무는 없고
달 항아리만 있다

간밤 몰래
도공(陶工)이 다녀간 뒤로

흰 속살
너머

천 개의 달 항아리가 떠있는
겨울 무밭에는

무는 없고
달 항아리들이 낳은
꿈들이 한가득 앉아 있다

한겨울 내내
산고(産苦) 속
생피 묻은 알 같은 꿈들이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영주일보

한겨울 무밭에 서 있었다. 고구마나 감귤들 수확도 모두 끝나, 인적 드문 하논 분화구(噴火口), 어느 적막(寂寞)한 무밭에, 희끗희끗한 눈발들은 금세 거칠어져 농도 짙은 함박눈이 물밀 듯이 쏟아져 내렸다.

분화구의 붉은 흙을 뚫고 쑥쑥 자란 무밭은 흰 눈으로 뒤덮여 무들은 간데없고 하늘인지 땅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공간에는 달 항아리 같은 꿈들이 한가득 앉아 있었다. 그것도 오랜 산고(産苦) 끝에 생피 뒤집어 쓴 알 같은 꿈들이.

서귀포 삼매봉 북쪽에 위치한 하논은 우리나라 최대의 화산 분화구이다. 칼데라 지형이며 마르(maar)형 분화구이고 매우 큰 화구(火口)를 갖고 있다. 하논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많다’란 의미의 ‘하다’와 ‘논’이 합쳐져 ‘논이 많다’란 의미를 포함하며 현재는 많이 줄었지만 분화구 내에 일부 논농사가 이루어진다.

시인은 사시사철 하논의 평화스런 풍경과 구부러진 길 따라 피고 지는 유채꽃과 갯나물꽃, 찔레꽃, 동백꽃,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 그리고 그 기특한 목숨들이 뿌리내린 붉은 흙을 아주 사랑하여 자주 산책을 나갔다.

흙은 생명의 수많은 시발점(始發點)이고, 붉음은 고통이고 뜨거움이며 날아오름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결국 기쁨으로 탈바꿈한다. 온갖 무기물과 유기물이 뒤섞여 수많은 생명체들을 끌어안고 있는 그 많은 흙 중에 붉은 흙은 특히 용암이 분출하여 형성된 분화구의 붉디붉은 흙을 만져보고 그 냄새를 맡아보면 어떤 흙 속의 내밀함과 무한한 힘이 느껴진다. 뜨거움과 비릿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런 것, 여자들처럼 붉은 피를 자궁으로 모으기도 하고 배출하기도 하며, 그 한겨울 내내 산고(産苦) 속, 생피 묻은 알 같은 꿈들을 생명들을 출산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도공(陶工)이 몰래 다녀간 뒤로 천 개의 달 항아리들이 떠 있다. 생피 같은 붉은 흙을 묻히며 지표면으로 뚫고 나온 당당한 무들은 바로 도공이며 달 항아리이며 한가득한 꿈들이다.

시작품을 쓸 때 제목부터 정하고 초고(礎稿)를 잡는 편이다. 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일상 소재 중 자연과 사람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특히 작은 존재들, 기특한 존재들 그 몸부림과 흔들림, 강인한 생명력들을 많이 표현해주려 한다.

이 함박눈이 그치면 하논으로 산책 나갈 시간이 기다려진다. 고통이 무엇인지 기쁨이 무엇인지 붉음이 무엇인지 원(元) 느낌을 되새기면서.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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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암 2021-01-16 11:00:13
흩날리는 무밭에

무는 없고
달 항아리만 있다

월랑 문희주 2021-01-16 10:45:31
겨울은 무채색이나 상금시인님의 시는 상금한 유채색입니다. 하논에 뜬 천 개의 달덩이를 사랑하는 맘은 더 곱수다.
겨울 달을 썰고 삶아서
곱고 착한 제주의 마음도 뿌려놓고
뜨거운 팬에다 달을 구워서
독일간 딸을 불러 먹이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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