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1-04-21 11:03 (수)
[문상금의 시방목지](8) 멀구슬에게
[문상금의 시방목지](8) 멀구슬에게
  • 문상금
  • 승인 2021.02.22 10:53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글동글 구슬들이 박혀있는 겨울하늘 파란, 달리 보석일까, 저마다 눈부신 보석인 것을! 빛남인 것을! 멀구슬 나무 그늘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세상이 빙빙, 다 빙빙, 돈다. 돌고 도는 것은 둥근 것이고, 둥글다는 것은 원이며 원(圓)은 우주이고 평등이다. 일치이고 조화로움이다. 빛이고 생명이며 비움이다 그리고 원(圓)의 종결은 결국 사랑이고 씨앗이며 영원이다. 화장(火葬) 잿더미 속 몇 과(顆)의 사리(舍利)이다.’
 

멀구슬에게
 

문상금
 

그리움도 타다보면
샛노래지는 것임을

빈 껍질만 펄럭이는
잠자리의 꽁지처럼

펄떡이는
내 심장에 박힌

단단한
씨앗 하나

잠자리의
겨울 꽁지보다

더 피 마른
사리(舍利) 하나
 

-제4시집 「꽃에 미친 女子」 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영주일보

요 며칠 바람 불고 풍랑 일고 눈보라가 몰아쳤다. 절 울(물결 울음) 우는 바다와 멀구슬 나무를 보러 다녔다. 내가 때로 나서는 길, 칠십리 시공원, 새연교, 강정 바다, 천지연길, 이중섭 거리, 보목 섶섬 근처, 쇠소깎에서 느닷없이 거센 바람을 만났다. 간혹 해무도 만났다. 소금기 어린 물방울들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내 영혼 깊숙이 차고 들어왔다.

그 축축한 것들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듯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넌 잘 할 수 있어. 잘 해 낼 거야” 말하듯 스며들었다. 그 잔잔한 물방울들의 속삭임들이 때로 무한한 용기가 되어왔음을 고백한다. 아주 가끔은 섣불리 시작한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시도 때도 없이 드는 매순간마다 그 잔잔한 말들이 나를 지켜주곤 했다. 내가 처음 시(詩)를 쓰기 시작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십대 초반 시(詩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나에게 아윤(芽潤) 선생님은 항상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너의 시를 안 읽어준다 하여도, 나만은 너의 시를 읽어주고 인정해 줄 것이야. 첫 번째 독자가 기꺼이 되어줄 것이야” 부단히 시를 쓰고 쓰라던 말씀들은 어둠속 횃불이 되어, 여태껏 내가 시를 창작(創作)하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나갈 수 있었던 버팀목이 되었으며 이제 여섯 번째 창작시집을 준비하게 되는 바로 힘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에 심상(心象) 시전문지로 등단소식을 접하였을 때, ‘오, 문 시인’이란 호칭으로 축하를 제일 먼저 해주셨다. 그 후 삼십 여 년이 지나도록 변함없이 호칭해 주시며 존중해 주셨으니, 가히 내겐 넘치는 복(福)이다.

시(詩)를 만나러 가는 길,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길 그리고 바다를 보러 가는 길목 한 귀퉁이에서 겨울 내내 내가 만났던 것은 바로 멀구슬 나무였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거친 비바람을 오래 견디어낸 듯 갈수록 단단해지는 몸통과 시원하게 뻗은 나뭇가지의 모습이었다. 노란 멀구슬을 잔뜩 품은 그 모습은 흡사 오백 명의 아들들을 먹일 죽을 한 솥 쑤다가, 그만 큰 솥 안으로 빠져 죽었다는 설문대 할망의 전설처럼 따뜻한 바로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마음이 넉넉해지고 한없이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특히 멀구슬 나무는 아무 동네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오랜 전통과 연륜이 있는 마을 어귀에 마치 솟대처럼 우뚝 서 있는 것이었다. 소사만이가 ‘백년 조상을 만나 모시고 와서 저 올레 멀쿠실낭(ᄆᆞᆯ쿠실낭,멀구슬나무) 상가지에 걸어두고’처럼 목숨차지 신(神,) 명감(命監) '사만이본풀이'에서도 언급된다. 그만큼 예로부터 제주사람들 삶과 일상생활에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어릴 적 옆집 마당에는 지천으로 열매들이 떨어져 뒹굴었는데, 봄과 여름을 지나며 과육은 삭아지고 타원형의 단단한 씨앗들이 남았다. 그 씨앗 한가운데에는 또 구멍이 있었는데 그것을 주워 줄에 꿰어 팔찌를 만들곤 하였다. 연보라 멀구슬 꽃은 엄청난 마력(魔力)의 향(香)을 내뿜었다. 펑펑 꽃눈이 내릴 때는 아! 하고 저절로 탄성이 쏟아졌다. 행복함의 여운 속에서 마음이 무척 설렜다. 한 폭의 풍경화에 한없이 매료당한 채로 오래도록 머물렀다. 그 꽃그늘 아래 앉아 있으면 탐스러운 꽃들은 연보라 목도리가 되어 내 목과 어깨 그리고 영혼까지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이었다.

간혹 그 나무의 상처 너머로 엿보이는 숱한 인고의 세월과 오랜 견딤이 나에게까지 무한한 힘으로 전해지기에 이 겨울 내내 나는 바다와 멀구슬 나무를 보러 다녔던 것이다. 그 나무처럼 나도 상처가 생길지라도 곧 아물 것이며 쓰러질지라도 훌훌 털고 일어설 것이며 더 유연하고 강해져서 세상을 향해 단단히 뿌리내릴 것이다. 흉터를 훈장처럼 보석처럼 앞가슴에 주렁주렁 자랑스레 달 것이다.

멀구슬 나무는 곧 시인이며 사리(舍利)를 모신 사리탑(舍利塔)이다. 멀구슬 열매는 곧 사리이다, 사리는 바로 시(詩)이며 시인은 죽어서 추릴 사리 몇 과(顆) 남길 수 있을까, 밤새워 도를 닦듯이 시(詩)를 쓴다. [글 문상금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문상금 2021-02-22 23:24:31
가끔 직박구리새들이 멀구슬 열매를 따먹는 모습을 봅니다 ~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바라보며 참 행복합니다 ~♡

가연 홍순옥세실리사 2021-02-22 21:36:13
멋지십니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신대로5길 16, 수연빌라 103호(지층)
  • 대표전화 : 064-745-5670
  • 팩스 : 064-748-5670
  • 긴급 : 010-3698-0889
  • 청소년보호책임자 : 서보기
  • 사업자등록번호 : 616-28-27429
  • 등록번호 : 제주 아 01031
  • 등록일 : 2011-09-16
  • 발행일 : 2011-09-22
  • 창간일 : 2011-09-22
  • 법인명 : 뉴스라인제주
  • 제호 : 뉴스라인제주
  • 발행인 : 양대영
  • 편집인 : 양대영
  • 뉴스라인제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1 뉴스라인제주. All rights reserved. mail to jeju@youngjuilbo.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