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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금의 시방목지](10) 자목련(紫木蓮)
[문상금의 시방목지](10) 자목련(紫木蓮)
  • 문상금
  • 승인 2021.03.09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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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은 나뭇가지에 피어난 연꽃, 주춤주춤 피어나 자줏빛 실크 블라우스를 입은 듯 잔주름 많은, 진득한 연륜이다. 지혜와 마음 비움이다, 마음이 심란할 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만 고요해지는 꽃! 무심(無心)의 세계, 나는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다.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무심히 밝은 달을 쳐다보고 무심히 꽃을 볼 때 나는 또 잔잔해진 호수로 돌아눕는다. 때로 깊은 강물이 되어 비로소 온전해진다. 속살이다 피투성이다 뒤집기다 눈부신 재탄생이다.’

자목련(紫木蓮)

문상금

봄이
너무 길다

흰 새떼가 되어
날아오르고 싶었는데

미처 백목련(白木蓮)이 되지 못한
꽃잎들은
봄 햇볕 아래
뒤집기를 수 만 차례
스스로 붉게 물들였다

형벌(刑罰)처럼

온 몸이
피투성이
될 때까지
 

-제5시집 「첫사랑」에 수록
 

문상금 시인
▲ 문상금 시인 ⓒ영주일보

이 세상에 작은 풀꽃일지라도 결코 쉽게 피어나는 꽃은 없다. 너도 그러하리니, 한 톨의 먼지일지라도 빛이 나는 먼지가 되리라.

쌀쌀한 바람을 뚫고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하는 목련들, 새벽과 정오 그리고 밤 달빛 속에서 부드럽고 섬세한 꽃잎들이 살포시 열리는 것을, 또 다른 작은 세상이 열리는 것을 관조적(觀照的)인 설렘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내게 한동안 소소한 기쁨이었다. 그 흰 깃털 같은 기쁨들이 어느 순간 흰 새떼들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떠나버린 텅 빈 자리에 나 혼자 뎅그러니 서 있었다. 배추 꽁다리 같은 쌀쌀한 바람이 한차례 내 머리를 흔들고 어깨와 등을 후려쳤다. 발가락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온 몸이 간질간질 간지럽더니 온통 비늘이 돋기 시작하였다.

오래전에 우연히 마주쳤던 흰 의자에 앉아있던 슬픈 눈의 소녀, 밤새도록 간지러워 긁어대어서 진물이 흐르고 두꺼워진 피부 사이로 찬란한 슬픔의 봄 같은 웃음소리가 가슴 아렸던 그 아토피의 소녀가 그랬을까. 돋는 비늘이 간지러워 나는 뒤집기를 시작하였다. 새벽부터 정오의 햇볕을 지나 밤이 들도록 하나둘 벗겨지는 비늘 사이로 붉은 물들이 뚝뚝 떨어졌고 떨어진 자리마다 꽃들이 태어났다. 흰 목련이 새떼 되어 떠난 자리에 비로소 자목련(紫木蓮)이 피어났다.

2010년도 5월에 25년 동안 재직했던 한국관광공사를 희망 퇴직하였다. 퇴임식은 서울에서 있었는데 전국지사와 공항면세점 직원을 포함해 약 200여명이 참석하였다. 맨 앞 가운데 내 이름표가 사장단과 같이 있었는데 마지막 건배자로 정해져 있었다. 이십대 초반에 입사해 직장과 병행해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연이어 시인으로 등단하였고 결혼하여 세 딸을 낳았으며 당시에 세 권의 시집을 펴냈으며 문화예술 활동이나 교육활동을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던 그 시간들, 많은 배려와 격려를 해주셨던 직장 동료와 상사들, 숱한 추억과 세월이 하나씩 주마등처럼 스쳤다. ‘위대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이 순간을 감사히 받아드린다고’ 마지막 건배사를 하고 연단을 내려오는데 모두 얼굴들이 빨개져 있었다.

당시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이 한우(현재는 이 참, 독일계 한국인)였으며 퇴직 전에 유급휴가 5개월이 주어졌고 기회에 서둘러 몇 개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낮에는 제주시내에서 제1급 자기주도 학습 지도자 연수를 받아 자격증을 취득하였고 밤에는 서귀포에서 컴퓨터학원과 요양보호사 자격증 공부를 하였다. 세 가지 모두 공부가 끝나면 이론시험이 주어졌고 통과하면 곧장 실기시험에 들어가 최종합격이 되어 자격증이 나왔다.

그 중 특히 요양보호사 실습을 서귀포 제일요양원에서 어르신들과 같이 주간에 근무하였는데 비록 열흘이었지만 내겐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바로 다가올 미래의 한 부분을 엿보았다고나 할까. 주로 식사보조와 목욕보조 그리고 오후 오락시간을 주도하였다. 어르신들이 허물 벗듯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챙기고 목욕하고 나오시면 부드러운 수건으로 닦아주고 로션 듬뿍 발라주기, 내복부터 차례차례 옷 입히기, 기저귀 갈아주기, 간식주기, 식사 보조하기 등등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일이 생겼다. 그래도 지친 줄을 몰랐다. 같이 실습하던 한 분은 일도 별로 안 했는데도 집에 가니 잠만 쏟아지고 코피가 밤새도록 터져 결국 중도하차하였다.

퇴임하신 교장선생님부터 약사, 한의사, 농장주 등등이 요양하고 계셨는데 그 중에 이북출신으로 월남하여 서울에서 이화여대를 나오셨다는 아주 고우신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어울리지도 않고 혼자 조용히 복도 긴 의자에 앉아 늘 창밖 풍경만 바라보시곤 하셨다. 하루는 말벗을 해드리려고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 혼자 중얼거리셨다. ‘참말 징그러워, 세월이 징그러워, 너무 징그러워’ 말없이 창 밖에는 자목련이 만개해 있었고 한 나뭇가지의 자목련 꽃잎들은 ‘징그러워’란 말이 들릴 때마다 온몸에 힘이 풀리는지 나풀나풀, 툭 툭 떨어져 내렸다. 그 자줏빛 피투성이로 구겨져 뒹구는 꽃잎들과 날이 저물도록 끊임없이 이어지던 할머니의 중얼거림을 여태 잊을 수가 없다. 움찔움찔 등 아래로 떨어져 내리던 각질 같은 비늘 같은 그 꽃잎들! 그 찬란한 봄의 슬픔들!

지금도 목련을 사랑하여 초봄엔 밤낮 목련꽃 따라 돌아다니곤 한다. 백목련이 흰 새떼 되어 날아간 그 자리에 다시 자목련이 피어나고 꽃잎들은 다시 떨어져 끝없는 징징한 슬픔으로 내 가슴을 타고 들어온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랫말도 있는데, 익어가다 그래도 세월이 징그러울 때는 나 철없는 동심으로 돌아가리라. 머리 흰 아이가 되어 방긋방긋 웃으며 박수도 치고 노래도 하고 시도 쓰고 동시도 쓰리라.

이 봄이 다가기 전에 마음을 탈 탈 털어서 비우고 또 비우고 싶다. 아직도 전환점(turning point)의 길을 가고 있다. 나의 두려움, 나의 절망 나의 희망, 나의 행복이 머무르는 ‘여기에 지금 이 순간!(here and now), 처절하게, 나 자신을 넘어 오롯 자신과 자유롭게 만나게 될 때까지!(beyond myself) [글 문상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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