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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시에 생애를 다 바친다는 심정으로 시를 써왔다”
“한 편의 시에 생애를 다 바친다는 심정으로 시를 써왔다”
  • 서연실 기자
  • 승인 2019.01.05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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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문인들](1)별과 바람의 시인 한기팔
“한결같이 50여년을 한눈팔지 않고 시와 더불어 살아 왔다”
유유자적한 삶의 관조, 구도자적 마음해법으로서의 시쓰기

세상을 보는 눈은 다양하다.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제주를 보는 눈도 그럴 것이다. 제주 사람들의 후한 인심, 천혜의 자연이 빚는 모양은 어떤 모습들일까? 예술가들, 특히 이 땅의 문인들은 제주를 어떻게 보고 표현하고 있을까. 또한 그들이 사유하는 바를 어떻게 옭아내고 있을까. 영주일보가 특유의 문학적인 감각과 감성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제주, 제주인들의 정신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제주문인들의 문학세상을 엮어 본다.[편집자주]

한기팔 시인
▲ 한기팔 시인 ⓒ영주일보

언제나 푸른 바닷빛으로 정감이 넘치는 서귀포시 ‘보목 포구’. 파초일엽 자생지 섶섬과 제지기오름을 비롯하여 제주의 대표 어종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는 자리돔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다. 특히 자잘한 보목 자리는 지귀도와 섶섬 해역의 토착성 어류로서 질좋은 해조류를 먹으며 자라는 덕에 가시가 드세지 않고 고기는 부드럽고 맛이 고소해 물회에 안성맞춤이라 소문나 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어획량이 급감하면서 그 명성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걱정의 소리가 크게 들린다.

보목 포구에 들어서면 한켠에 서 있는 시비(詩碑)가 보목 자리돔을 대변하며 방문객을 반긴다. 이 시비에는 보목리가 낳은 우리 시대의 시인 한기팔의 시 ‘보목물회’가 새겨져 있다. 2년여 전인 지난 2016년 5월 27일, ‘제16회 보목자리돔축제’가 열리던 첫날에 제막식을 열고 세워진 시비는 어느새 보목리뿐만 아니라 제주의 명물로 자리잡고 있다.

자리물회가 먹고 싶다.
제주 사투리로
‘아지망 자리물회 하나 줍서’ 하면
눈물이 핑 도는,
가장 고향적이고도 제주적인 음식.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톡 쏘는 제피 맛에
구수한 된장을 풀어
가난한 시골 사람들이
여름 날 팽나무 그늘에서
한담을 나누며 먹는 음식.
아니면
저녁 한 때 가족들과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아
먼 마을 불빛이나 바라보며
하루의 평화를 나누는
가장 소박한 음식.
인생의 참
뜻을 아는 자만이
그 맛을 안다.
한라산 쇠주에
자리물회 한 그릇이면
함부로 외로울 수도 없는
우리 못난이들이야
흥겨워지는 것을


- 한기팔 詩 ‘자리물회’ 전문

가장 고향적이고 제주적인 음식 ‘자리물회’가 토속적으로 다가온다. 그 맛은 물론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까지 눈에 선하다. 시골 사람들이 팽나무 그늘 아래 둘러 앉아 한담을 나누며 먹는 정겨운 풍경이나 멍석을 깔고 앉은 가족들이 하루의 평화를 나누는 가장 소박한 음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온다. 한라산 쇠주와 외로움을 털어버리는 흥겨움이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시인 한기팔은 "최근에 제주문화예술재단의 원로예술가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생애사 채록과 선집 출간 준비에 돌입했다"고 한다. 한기팔 시인의 삶의 궤적과 그동안의 시작업을 망라하는 아카이브화가 이뤄지는 중이다.

올해 팔순을 넘긴 한기팔 시인은 시의 고향 서귀포가 낳은 대표적 제주 시인이자 한국문단의 원로로 꼽힌다. 지난 1975년 「심상」신인상으로 등단해 1975년에 첫 시집 『서귀포』 상재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불을 지피며』, 『마라도』, 『풀잎소리 서러운 날』, 『바람의 초상』, 『말과 침묵 사이』,『별의 방목』, 『순비기꽃』등 모두 8권의 시집을 펴냈다.

한기팔 시인은 제주도문화상(1984), 서귀포시민상(1992), 제주문학상(2003),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2014)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서귀포문학회를 창립해 지역문단과 예술계 발전을 이끄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총서귀포지부장, 한국문인협회제주지회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일에도 동분서주하면서 힘써왔다.

초겨울 햇살 좋은 날, 서귀포시 중앙로터리 인근에 위치한 ‘서귀 화랑’에서 시인 한기팔 선생님을 만났다. “한 편의 시에 생애를 다 바친다는 심정으로 시를 써왔다”는 선생님은 한평생 그러한 시심으로 임해오면서 시작업을 내려 놓아본 적이 없다 하신다. 시를 ‘신앙적 위안과 삶의 가치’로 삼아 살아왔다. 그래서 ‘담백한 서정성의 시’, 이미지와 절제로 빛나는 ‘향토적 서정’이 주조를 이루는 한기팔 선생님의 시는 독자들에게 커다란 위안과 평화로움을 안겨준다.

시심도 시심이지만 한기팔 선생님이 사는 바닷가 마을 보목리의 “하늘 한 귀퉁이 휑하게 뚫린 구멍 하나 너무 커서 나는 밤마다 물떼새 소리로 잠이 깹니다”라고 노래할만큼 보목리은 아름답고 청량하다. “시 쓰기작업은 구도자적인 마음해법으로 자기존재를 주술적으로 풀어내는 평화작업이라 할 수 있다”고 들려주면서 “우주의식에서 비롯된 자아적인 존재가치를 시와 일치시키려는 시 정신, 바로 그러한 세계가 내가 몰입해 들어가는 시심의 세계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지난 2014년에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받았을 적에는 “상을 탄다는 일이 격에 맞지 않은 옷을 입는 일처럼 어색하기만 하다”면서 “젊어서는 하늘 보며 살고 늙어서는 땅을 보며 사는 심정으로 한결같이 50여 년을 한눈팔지 않고 시와 더불어 살아 왔다”는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지금까지 써오신 시편들 모두가 특별하고 아까운 게 사실일테지만 그 가운데 마음에 두는 시편들이 있다면 말씀해주시라는 청에 한기팔 시인은 “보목 포구 시비 ‘자리물회’를 비롯해 서귀포시공원의 시비에 새겨진 ‘서귀포’, 또 시집 「별의 방목」에 담아낸 시편 등이 떠오른다”고 들려주셨다.

마당귀에
바람을 놓고
귤꽃
흐드러져
하얀 날
파도소리 들으며
긴 편지를 쓴다.

- 한기팔 詩 ‘서귀포’ 전문

한기팔 시인
▲ 한기팔 시인 ⓒ영주일보

‘바람과 하얀 귤꽃’, ‘파도소리에 실린 긴 편지’가 전하는 시공간과 마음 한 자락, 그리고 그 빛깔과 묻어나는 정감. 서귀포 이미지이다. 한기팔 시인은 시 ‘西歸浦에 와서는’에서 “푸른 바다가 서러워서 울고/ 하늘이 푸르러서 울어버린다”고 풀어놓았다. “먼 파도 바라보며 울고/ 사랑의 그리움만큼/ 수평선(水平線) 바라보며/ 울어버린다”는 서귀포는 시의 本鄕이다.

한기팔 시인은 지난 11월에 보목리가 속한 서귀포시 송산동민들이 주는 ‘제4회 자랑스러운 송산인상’을 받았다. 송산리가 낳은 문화예술인이면서 지역의 자연과 역사·인문사회·문화예술 등을 총망라한 문화홍보지 ‘송산의 바람’ 출간에 있어서 편집위원장을 맡아 기여한데 대한 감사의 증표라고 한다. 고향 사람들이 정성을 담아 주는 감사의 선물인 셈이다.

영혼이 따뜻한 사람은
언제나 창가에
별을 두고 산다.
옛 유목민의 후예처럼
하늘의 거대한 풀밭에
별을 방목한다.
우리의 영혼은 외로우나
밤마다 별과 더불어
자신의 살아온 한 생을 이야기한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은
나의 목동이다.
연못가에 나와 앉으면
물가를 찾아온 양떼처럼
별들을 몰고 내려와
첨벙거리다 간다.

― 한기팔 詩 ‘별의 방목’ 전문

별을 두고 사는 삶. 그것은 삶에 있어서 희망이요 지표가 아닐까 여겨진다. 한기팔 시인은 삶의 자리에서 별을 방목한다. 별과 더불어 살아온 삶의 여정에 오롯이 드러난다.

서귀포에서는
어디서나
수평선이 보인다
솔동산 오르막길을 가노라면
수평선이 따라와
내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니
섶섬과 문섬
범섬과 새섬 사이
지는 해의 온기로 남아 있는,
우성宇城과 소암素菴
광협光協과 성찬成贊
그들이 두고 간 수평선과
정축년丁丑年 류하榴夏 지귀地歸로 와서
보리누름 속에서 "고을나高乙那의 딸"과
술래잡기를 하던 미당未堂과
1974년 가을 세미나에서 돌아와
밤바다에 배를 대고
"밤구름"을 낚던 목월木月과
6.25 때 피난 오면서
황소 한 마리 몰고 와
알자리동산에서 코뚜레를 풀던
중섭仲燮이 데리고 온 수평선.
서귀포에서는
어디를 가나
바다는 없고
돌담 너머로
아득히 수평선만 보인다.

- 한기팔 詩 ‘수평선’ 전문

우성宇城과 소암素菴, 광협光協과 성찬成贊, 류하榴夏. 고을나高乙那의 딸, 미당未堂, 목월木月, 중섭仲燮 등이 ‘수평선’ 이미지로 중첩된다. 한기팔 시인이 숙명처럼 보듬고 살아가는 수평선에 다름 아니다. 어깨를 툭 치기도 하고, 두고 가기도 하고, 데리고 오기도 하는 수평선인 것이다. ‘서귀포에서는 어디를 가나 바다는 없고 돌담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수평선의 이미지는 한기팔 시인이 맞닥뜨리는 삶이요 현실이 아닐까.

제주어 시 쓰기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한기팔 시인은 “10편 정도 제주어로 시를 써보기도 했는데 제주어를 나열하는데 그친 시들이 발표되는 현상에는 부정적이다”는 견해를 밝힌다. 시로서 갖춰야 할 시정신이나 ‘흥’이 담겨 있지 않으면 시라고 보기 어렵다는 말씀이었다. 그리움이라든지 한(恨) 등을 이미지화하는 ‘상’이 없이 제주말만 늘어놓는다고 하여 그것을 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는 평이시다.

‘4.3 시’ 역시 마찬가지라 하셨다. “시로서 기본적 요건과 품격을 갖춰야 시가 되는 것이지, 4.3에 대한 이념만 떠든다고 하여, 외친다고 하여 모두 시가 되는 게 아니라 4.3의 내재화가 필요한 것”이라 조언했다. 타고르에게서 영향을 받아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아픔을 절절하게 담아내면서도 떠들지 않는 한용운 선생의 시에서 배울 점이 많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셨다.

한기팔 시인은 시를 쓰는 시간을 일정하게 정해 놓지는 않는다 말씀한다. 언제 어디서건 시상이 떠오르면 그때마다 메모를 해둔다고. 차를 마시다가, 길을 걷다가,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찾아드는 영감, 끝간데를 모르는 시상을 계속 끄적이게 만드는 일상이어서다. 그러한 메모들을 다시 정리하고 시심으로 꿰매기 좋은 시간은 새벽 2시 이후라신다. 깨어나서 의식이 좀 더 명징해지는 시간이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 정리한 작품은 8권의 시집에 이어 이제 곧 제9시집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한창 이루어지고 있는 구술사뿐만 아니라 동시에 추진되고 있는 시선집에는 제9시집까지 들어가는 작품 가운데 320편을 가려 싣게 된다. 「삶과 꿈」에 실렸던 시편들을 비롯해 시인들이 뽑는 좋은 시로 선정되었던 50편의 시도 시선집에 들어간다. 이러한 작업은 나기철, 오승철, 김원옥, 김규린 등 네 분의 시인이 맡았다고 들려주셨다.

최근에는 시인 몇몇과 함께 신화탐방에 나서고 있다. 터키를 경유해 그리스를 다녀왔고 올해에는 중국과 러시아 경계 지역과 달라이 라마 거주 지역 등을 돌아볼 계획이라시며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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