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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일 시인, 시인수첩 신인선33호 『연애의 뒤편』펴내
정찬일 시인, 시인수첩 신인선33호 『연애의 뒤편』펴내
  • 유태복 기자
  • 승인 2020.05.17 18: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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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경계에서 서성이는 산책자
4·3을 품은 시인 정찬일의 세 번째 시집
정찬일 시인
▲ 정찬일 시인 ⓒ영주일보

정찬일 소설가 겸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연애의 뒤편』이 〈시인수첩 시인선〉 서른세 번째 시집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깊은 골 다 메우던 푸른빛 지우며 집에서 너무 멀리 와 잔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연애의 뒤편』 시집에는 ‘시인의 말’을 시작으로 제1부 ‘물의 얼굴, 사람의 얼굴’ 편에 ‘큰넓궤 겨울 별뉘’ 외 13편, 제2부 ‘태풍을 대하다’ 편에 ‘연애의 뒤편’ 외 13편, 제3부 ‘풋사과의 내력’ 편에 ‘혼야’ 외 16편, 제4부 ‘작주로 가득한 날들’ 편에 ‘빈방’외 15편, 해설편에 홍기돈(가톨릭대학 교수) 문학평론가의 ‘전회(轉回)의 시학-무(無)를 근거로 삼는 자기 구원의 도정’이란 제목으로 해설 등 총61편의 시가 209페지에 수록됐다.

정찬일 시인은 1998년 『현대문학』에 ‘시’가,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시인으로, 소설가로 문단에 선 뒤 운문과 산문을 아우르며 작가의 길을 충실히 걸었다. 그는 소설 「꽃잎」으로 2002년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았다. 시 「취우(翠雨)」로 2018년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동안 정찬일 시인이 탐색해 온 그림자는 기실 ‘시대의 그림자’인바, 유년 시절 이후 줄곧 제주도에 깃들어 살아온 그는 제주의 아린 상처를 간직한 4·3 항쟁의 흔적들을 더듬어 그림자에 어린 진실을 밝혀 내는 일에 시인으로서의 인생을 걸었다.

정찬일 시인은 “4·3으로 잃어버린 마을 ‘삼밧구석’의 슬픔과 아픔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편 치유의 과정을 잘 드러낸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당선 시 「취우(翠雨)」는 계절마다 시간마다, 수십번씩 삼밧구석을 찾아가 그 터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골똘히 들여다보며 침잠한 끝에 건져 올린 작품이다. 시리고 아린 4월의 봄, ‘시적 성취와 함께 치유의 덕목을 고루 갖춘’ 그의 시편들을 더듬으며 바람과 울음, 그 소리에 비낀 4·3의 슬픔 쪽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가 볼수 있다.

홍기돈 평론가는 “오랫동안 4・3은 한국 사회에서 언급조차 불온시되었고, 그러한 현실에 맞서느라 4・3 소재 시편들은 참상의 고발・증언에 치중해 왔던 경향이 있다”라며 “금기가 풀리면서 4・3을 다루는 시작법이 여러 갈래로 모색되고 있는바, 정찬일은 전면화시킨 자연 가운데 4・3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제 길을 내고 있음이 이로써 증명된다.”라고 해설, 「전회(轉回)의 시학」 부분에 평했다.

정찬일 작가의 약력은 1964년 전북 익산 태생. 1998년 『현대문학』 시 등단,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2002년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소설 부문), 2018년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시 부문)을 수상했다.

시집 『죽음은 가볍다』, 『가시의 사회학社會學』을 펴냈다. 다층 동인, 제주작가회의 회원으로 문학 활동하고 있다.

정찬일 시인의 시인수첩 신인선33호 ‘애인의 뒤편’, 문학수첩 발행, 값8000원
▲ 정찬일 시인의 시인수첩 신인선33호 『연애의 뒤편』, 문학수첩 발행, 값8000원 ⓒ영주일보

‘4월 3일, 저물 무렵’

 

저물 무렵은 누군가에게서 묻어오는 감정의 흔적들이다.
높은 담 이마 너머로 하나둘 형광등 켜진다.
이제 막 화살나무의 작은 싹들이 돋아 오르고
아기 손톱만 한 연둣빛 감잎들
그 곁에 세 그루 적단풍의 연한 잎들이
내 뺨을 스치는 바람에 소리 없이 흔들린다.
낮은 담 너머 아가의 여린 손금 조심스럽게 펴지듯
잎맥 펼치는 무화과나무, 장손의 표정으로 말없이 서 있다.
자잘자잘 꽃잎 매달린 마을 어귀 팽나무에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무렵이다.


일흔 해 전 그날도 이랬겠다.


각지불 하나둘 낮고 성근 돌담 너머로 번지며 켜졌겠다.
이제 막 화살나무 작은 싹들이 돋고
아기 손톱만 한 연둣빛 감잎들
그 곁에 적단풍 몇 그루의 연한 잎들이
보릿고개 넘기는 수척한 누이의 봄 뺨을 스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겠다.
바람의 길 너그럽게 풀어놓은 낮은 담 너머 무화과나무,
아기 손에 난 여린 손금 조심스럽게 펴지듯
잎맥 펴고 있었겠다.


캄캄한 밤, 불로 일렁이며 붉던 오름들도
저녁노을 아래 낮 동안의 고단한 표정 가라앉히며
침묵의 밤으로 깊어가고 있었겠다.
마을 어귀의 팽나무 자잘자잘 꽃잎 매달려 있었겠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날이었겠다.
성근 그늘에 꽃 핀 봄날 저물 무렵이었겠다.
간절함 없이 따라온 내 길 뒤돌아본다.
비어 있다.
먼 길 걸어온 얼굴들 들여다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듯
먼 길 걸어온 나무들의 길 뒤돌아보면 눈물이 스며 난다.
쭈그려 앉은 나무들 눈이 시리게 바라보고 있으면 새잎
처럼 눈물이 돋는다.


그날도 백목련 개나리, 앵두꽃 벌써 진 봄이었겠다.
산 목련 피려면 조금은 더 기다려야 하는 날이었겠다.
마을 가까운 머흘왓* 밭담 위
으름과 멍 덩굴에 성급한 꽃들 한창이었겠다.


오랜 밤 거쳐 온 길 다 옷 벗는 봄빛 새잎들 앞에서
꽃잎들 앞에서
내 말들이 저녁 물빛처럼 침묵한다.

저물 무렵의 나무들,
누구도 심문하지 않는 침묵의 밤으로 깊어가고 있었겠다.

 

* 지면에 돌 따위가 박아지고 자갈이 많이 섞인 밭.

정찬일 시인의 시 ‘4월 3일, 저물 무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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잣디 2020-05-19 02:54:05
그 날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이 말 하는 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쉬운 것이었습니다
그날 분명히 저가 질문 했잖아요
"시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거냐고"
당신을 만나기 전까지 결코 시 가까이 갈 생각이 없었는데 당신의 진지하고 순진한 말을 듣고
정말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 "
열심히 했지요
황홀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손 털고 씻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생각할 때마다 행복합니다
큰 행운이었고 좋은 추억입니다
솔직히 선생님의 두 시집은 난이도가 높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밑줄 그으며 돌머리 굴리며 노트를 새로 마련하여 옮겨 적으며 공부했지만 ᆢ
이번 시집은 그 나마 좀 쉬운 것 같네요
ㅡ 허용된 지면이 끝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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